가느다란 선으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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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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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도 나의 SNS 친구들이 많이 언급한 영화. 나중에 봐야지 벼르던 영화를 구독 중인 OTT 플랫폼에서 딱 마주치는 건 만사를 제쳐두고 시작 버튼을 누를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 하고 12살에 헤어진 두 친구. 12년 후 미국과 한국에서 SNS로 재회했지만 연인이 되지 못한 채 다시 한 이별. 영화는 또 그로부터 12년 후 36살이 된 두 친구가 뉴욕에서 만나 며칠을 보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맞이한 진짜 이별. 영화를 다 본 내 마음엔 특별한 감상이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한국계 인이면서 미국에 사는 디아스포라 감독이 과거와 과거에 두고 온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감응하지 못한 탓일 거다. 누군가에게 엄청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전생에 나라를 구했네 라고 축하 인사를 건네고 함께 사진을 찍고 싶을 때 이것도 인연인데라며 카메라를 드는 일이 자연스러운 나라에서 살다 보니 전생의 업이 쌓여 지금의 인연을 만들었다는 영화의 주제가 새롭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계속 생각한 건 내가 나여서 놓친 부분이 무얼지 궁금해서였습니다. 영화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겠다는 관객들은 무엇을 느낀 걸까. 그들도 영화 속 해성과 로라처럼 12년 전 즈음에 24년 전 즈음에 두고 온 인연들을 가끔 떠올리며 살고 있는 걸까.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릿해지는 걸까. 나와 닮지 않은 마음들을 들여다보다 나의 기억을 뒤적여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기억은 그간 잊고 지낸 게 놀라울 정도로 생생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뭔지도 모르던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의 미소 띤 얼굴이 특히. 자연스레 그들의 지금이 살짝 궁금해졌습니다. 부모님 따라 성당에 다니던 10대 초반 시절 유독 나를 이뻐해 맛있는 걸 자주 사주던 교리 선생님은 여전히 독실하실까. 초등학교 때 단짝이었다가 중학교에 올라가며 헤어진 후 20대 중반에 잠시 어울리다 다시 연락이 끊긴 그 친구는 어디에서 뭘 하며 살고 있을까. 같이 연세대 농구부를 응원하러 다니던 그 친구들은 대학생 때 뭘 하든 같이 놀던 그 친구는 건조한 직장생활에 농담을 동동 띄워주던 그 동료는 지금 뭘 할까. 영화에서처럼 해성과 로라 남편의 만남도 인연이라 한다면 과거의 우리도 서로에게 인연이었을 터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재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 우리의 연은 끝이 난 걸까. 어쩌면 끝이 아닐 수도 있을까. 감자 활용 방법 알아보고 다양한 감자요리 체크 지금 이생도 몇십 년 후엔 패스트 라이프 가 되어버릴 테고 다음 생에 다시금 옷깃을 스치게 될 수도 있으니. 조금 더 특별한 인연을 기대해본다면 우린 또 같은 반 앞뒤에 앉아 있을 수도 있겠다. 영화에서 로라는 해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며 울음을 터트립니다. 로라가 왜 울었는지 알고 싶어 리뷰를 몇 개 찾아봤다. 하지만 경험과 성향과 감성의 영역을 논리적으로 풀어주는 리뷰를 찾지 못해 급기야는 상상을 해보았습니다.
싫어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화로 어쩔 수 없이 멀어진 인연들이 어느 날 굳이 나를 찾아와 작별을 고한다면. 우린 이제 정말 끝이고 앞으론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못을 박는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 어차피 다시 만날 일 없던 인연들이었지만 막상 어떤 인연의 끈은 싹둑 자르려는 상상만으로도 울컥하게 됐습니다. 이 울컥함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선으로라도 계속 이어지고 싶은 인연이 내게도 있었다는 걸 알게 해주었습니다. 이제야 12살엔 너무 어려서 제대로 헤어지지도 못했고 24살엔 좋아하는 마음을 누르고 헤어진 누군가가 내게 찾아와 안녕 작별 인사를 한다면 나도 어쩌면 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보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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