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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루디 반 겔더에 관하여 . . . . . . 4-2 [내용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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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집어 넣어보고,,,,역시나 곳곳에 도사린 오타와 어색한 내용을 약간 손봤습니다.


블루노트 사운드를 창조한 남자
루디 반 겔더
최신 리마스터링에 대한 생각을 듣다. [스윙저널 2007년 7월호 중에서]

재즈계에서 자랑으로 여기는 명 레코딩 엔지니어 루디 반 겔더. 모던 재즈 사운드를 창조한 이 위대한 남자는 현재 최신 기술을 구사하여 블루 노트 최고의 명반 100타이틀을 리마스터링 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이 같은 블루노트의 명반이 탄생한 배경과 새로운 리마스터링 작업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기 위해 모던 재즈 레코딩의 성지인 잉글우드 크리프스에 위치한 반 겔더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장시간의 인터뷰를 감행했다.
 ● 原田和曲

맨하탄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조지 워싱턴 브릿지를 건너 펄사디스 파크웨이로 들어선 후, 2번째 출구를 통과하면 조용한 주택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그 중 잡목으로 둘러싸여진 한 귀퉁이에 개성적인 건물이 있다. 뉴저지-주의 잉글우드 크리프스에 위치한 반 겔더 스튜디오다.

루디 반 겔더(1924년 뉴저지-주  저지-시티 출생)는 설명할 필요 없이 재즈계에서 자랑하는 명 레코딩 엔지니어다. 본업은 시력 검사원이었지만, 50년대 초반부터 프로 레코딩 엔지지어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당초는 뉴저지-주 하켄섹(Hackenseck)에 있는 자택의 일부를 녹음실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59년 여름에 하켄섹 북동(北東)쪽에 위치한 잉글우드 크리프스에 현재의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세션에 관계해 오고 있다. 1998년부터는 모던재즈 황금 시대의 레코딩(그 태반은 그에 의해 녹음된 것이다.)에 대한 마스터링 작업에 다망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반 겔더 스튜디오를 방문한 것은 2000년에 이어 2번째이지만 장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전에 [모든 질문 사항을 제출해주기 바란다]는 요구를 받았는데, 그 점에는 솔직히 놀랐다. 조금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인터뷰를 할 때 쯤에는 그에 관련된 오해가 눈 녹듯이 녹아 버렸다.

반 겔더는 이 쪽에서 E-메일로 보낸 질문 사항을 프린트 하여 하나하나의 질문에 대해 정말이지 정성껏 답변을 써 넣은 것이었다. !  질문에 따라서는 몇 번이나 고쳐 쓴 흔적이 있었다.

그는 확실히 재즈 레코딩 엔지니어로서는 유일무이한 유명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능인은 아니다. 인터뷰를 할 기회만 하더라도 탤런트나 뮤지션에 비하면 대단히 적을 것이다.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여 일본의 팬에게 베스트 답변을 전하고 싶다……’ 사전에 질문 내용을 요구한 것은 팬에 대한 반 겔더의 성실한 대응이기도 있던 것이다.



<< 시력 검사와 녹음을 병행한 하켄섹 시대 >>
 
반 겔더가 블루 노트의 오너이자 프로듀서인 알프레드 라이언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은 1952년의 일이었다. 반 겔더의 음을 들은 라이언은 ‘이것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운드다.’라고 기뻐했으며, 54년 이 후 블루노트에서 행한 대부분의 레코딩을 담당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시력 검사원과 엔지니어라는 겸업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엔지니어로서 전념하게 된 것은 1960년대, 잉글우드 프리스크의 스튜디오로 옮기고 난 후부터였습니다. 그 때까지 시력 검사와 레코딩을 모두 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 레코딩 일로 바빠지게 되었기 때문에 풀타임 엔지니어가 된 것이죠. 하켄섹 시대에는 두 가지 일을 줄곧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전설의 하켄섹 스튜디오 관한 반겔더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부모님 집의 거실을 개조하여 스튜디오로 쓴 것입니다. 매우 좁았죠......정확한 면적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뮤지션이 5명 정도 들어서면 발 디딜 틈도 없었습니다. ] ‘저기서부터 저기쯤 정도 였을라나’ 하는 반 겔더의 설명으로 보면 하켄섹의 스튜디오는 대략 33제곱미터(약10평) 되었을까. 그런 작은 공간에서 캐논볼 에덜리의 [Somethin’ Else], 소니 클락의 [Cool Stryttin’] 리 모건의 [Candy]같은 앨범이 속속 만들어진 점에는 아무리 놀라도 지나치지 않다.
[난 컨트롤 룸에서 레코딩 기재를 조작하고 있었죠. 하켄섹의 스튜디오는 녹음실과 콘트롤 룸을 유리로 나눠 놓았습니다. 예전의 라디오 방송국 같은 스튜디오였죠.]



<< 나무의 감촉을 중요시한 아름다운 울림의 스튜디오 >>

그리고 59년 여름, 반 겔더는 잉글 우드 크리프스에 스튜디오를 설립한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대단히 특징적인 건물로, 일부에서는 일본의  '쇼-소-잉'(역자:正倉院 - 나라 시대의 건물로서 7,8세기의 예술품이 간직되어 있는 경내의 보물 창고)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설도 있었지만, ‘정창원이라고, 그게 뭐죠?’라고 하는 반 겔더 본인의 말에 의해 부정되었다. 포토그래퍼인 常盤武彦씨가  '쇼-소-잉'정창원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 루디 반 겔더는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나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미국의 유명한 건축가)의 제자에게 설계를 의뢰했습니다. 프랭크는 일본에서도 잘 알려져 있으며, 그곳에다 건축물을 남기기도 했지요. 때문에 그의 제자가 일본식 건축물을 설계한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난 일본의 있는 가구도 좋아합니다. 집에 있는 테이블이나 의자는 미국에 있는 ‘재팬 우드 워커’의 작품이죠.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제자와 반 겔더와의 접점은 언제 있었던 것일까.

[ 1959년입니다. 맨하탄의 어떤 미술관이었는지는 잊어 버렸습니다만,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전람회가 있었죠. 그것에 대한 소개 기사를 뉴욕 타임즈에서 읽곤 와이프와 함께 서둘러 찾아갔습니다. 훌륭한 컨셉의 작품들이었죠.
지나친 페인팅을 자제한 생생한 나무의 색, 자연스런 색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전시였습니다. 그 전람회에서 프랭크 로이드의 제자와 알게 되어 스튜디어의 건축을 의뢰했던 것입니다.]
물론, 숙고에 숙고를 거듭한 반 겔더였기 때문에 스튜디오의 건축에는 얼마간의 유보가 있었다.
[다른 건축가가 들고 온 아이디어가 모두 좋았던 것은 아니었죠. 어쨌든 나는 나무의 감촉을 중시하여, 음이 아름답고 생생하게 울리는 스튜디오를 원했습니다. 이 스튜디오는 매우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잔향이 걸리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은 디자인과 기능의 양면에서 모두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점도 반 겔더에게는 매력적이었던 것이다.
[토쿄에 있는 그의 건축은 큰 지진에도 붕괴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구제국 호텔은 토쿄 대지진이라는 재난에서도 무사했다는 에피소드를, 그는 어디선가 들었던 것일게다.’
그는 처음으로 잉글우드 프리스크의 스튜디오에서 취입한 아티스트에 관한 기억을 더듬어 들려주었다. 

- 계속 -

@@@ 다른 곳에 옮기지는 말아 주세요,,다른 이유는 아니고 급하게 대충대충하느라 오타나 오역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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