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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잡한 마음에 글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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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디자이너의 꿈을 품고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습니다. 처음 이 직업이 가지고 싶다고 마음을 다지고 고등학교 군대 대학교를 거치다 어느새 1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고 사운드 스튜디오에 취직하게 됬습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방송 프로그램을 정말 많이 하는 곳이었습니다. 스튜디오도 작은 편이 아니었고요.(업체명은 회사에 피해를 주고 싶은 마음도 없고 저를 위해서도 밝히지 않겠습니다. 댓글 쪽지 등 개인적으로 물어보셔도 답변해드리기 곤란합니다)

지난 시간이 보상 받는 기분이라 기쁜 마음으로 출근했고 나름 자부심도 있었죠.

그런데 근로 계약서도 쓰지 않고 연봉과 기본적인 연차 등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고 들어갔던 것이 화근이 된 것 같습니다. 바보같이 기본적인 것도 물어보지 않고 들어간 제 잘못도 크다 생각합니다. 취업난에 이곳저곳에서 낙방 소식만 듣던 사회초년생이 그것도 사운드처럼 좁은 업계에서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되니 머리로는 이상하단 걸 알아도 마음이 애써 그걸 무시하더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턴월급으로 120만원 정도를 3달동안 받으며 일했고 이후로는 190정도 받으며 근무했습니다. 공휴일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설날이고 추석이고 부모님 뵈러 한번 내려 가보지도 못하며 그렇게 일을 했습니다. 일이 많아지면 주말 출근하는 건 일상이었고, 1년 넘게 근무한 기간 동안 야근이 없었던 날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인턴 기간에도 첫 출근 날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매일 야근하며 저 돈을 받았습니다.

야근도 뭐 정규 퇴근 시간인 6시를 넘기면 야근이다. 이런 개념이 아니라 막차를 타고 집에 가거나 막차가 끊겨 택시를 타고 집에 가야 하는 그런 날들.. 일이 너무 쌓인 날엔 해가 뜨는 걸 보며 퇴근하고 2시간인가 잔 후 다시 출근하고 그랬습니다.

매일 매일 당장 내일이 안보이고 캄캄하더라고요. 제가 그토록 바라던 일을 하니 제 일이 재밌긴 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참 좋았고요. 그런데 물가는 매년 오를 대로 오르는데 정작 저는 제가 어렸을 때 저희 부모님이 받았을 법한 월급을 받고 있는 게 참... 아무리 제가 좋아하는 일이라 해도 견디기가 힘들더라고요. 

특히 또래 친구끼리 연봉 이야기가 나올 때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대기업도 아니고 중소기업에 들어간 친구들도 나는 2700이다, 나는 3000이다, 나는 3200이다... 영상 편집자로 취직한 다른 친구는 3400부터 받기로 했다 하고.. 

제가 고소득의 연봉을 바라며 온 건 아니지만 적어도 식당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보다는 돈을 잘 벌거라고 생각했습니다(절대 그분들을 비하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면 이렇게까지 밤이고 낮이고 주말이고 연휴에도 일하는데 최저시급도 안되는 돈을 받으며 일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그래도 계속해보려고 했습니다. 급여야 언젠가는 오를 거라고 믿어보기로 했고(사실 직장 선배들이 사는 걸 보면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오를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았기 때문에 꾸준히 하려고 했죠.

직장에서 첫 번째 설 연휴를 회사에서 보냈을 때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서는 "무슨 놈의 회사가 설날에도 일을 시키냐? 초과수당은 다 주는 거냐?"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전화를 하시더라고요.. 차마 사실을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초과수당에 명절 떡값까지 빵빵하게 준다고, 원래는 일이 이렇게 까지 바쁘진 않은데 방송이 원래 설에는 특집 방송도 하고 엄청 바쁘다, 나중에 휴가 내서 내려가겠다. 말해 놓고 전화를 끊으니까 이게 뭐하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 때 제 상황을 유일하게 알고 있던 같은 방송계열의 친구한테 "전태일도 설날엔 고향 내려갔겠다"하며 반쯤 농담 섞인 푸념을 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또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추석 연휴가 왔을 때 저는 당연히 회사에서 일했고 또 부모님에겐 다음 구정엔 꼭 뵙자고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하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제 고향이 좀 멀리 있습니다. 그래서 명절에 한 번 내려갔다가 가족분들 뵙고 서울 올라오려면 아무리 못해도 최소 3박 4일 일정은 잡아야 합니다.

혹시 웹툰 '신과 함께' 보셨나요? 거기 주인공이 불효자들 가는 한빙지옥에서 심판받을 때 일이 바빠 명절에 부모님도 못 뵈며 살았던 뭐 그런 에피소드가 있는데, 순간 이 생각이 머리를 확 스치더군요. "아 이렇게 살다 간 난 평생 부모님께 자식 노릇 한번 못해보고 부모님 돌아가시겠다." 진짜 섬뜩했습니다. 저는 물욕이 별로 없습니다. 앞에서는 계속 돈, 돈 하니까 돈 무지 밝히는 놈 같긴 한데.. 저는 옷도 별로 안 사입고 어지간해선 좋은 걸 하나 사서 몇 년씩 입고 그럽니다. 핸드폰도 고장나서 작동이 멈추지 않는 한 계속 쓰고요. 그런 제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이유는 저 키운다고 노후 준비도 못하신 저희 부모님 어떻게든 제가 책임지고 살고 싶어서 돈을 좀 많이 모으고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살면 정말 아무 의미 없을 것 같더라고요.


그렇게 또 몇 달을 더 다니며 고민하다가 결국 1년 반 만에 회사에서 나왔습니다. 후련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내가 뭘 위해 지금까지 공부하고 대학 나오고 했나 좀 그렇더라고요.

냉정하게 보면 그냥 업계 시스템에 적응 못하고 나가떨어진 낙오자입니다

회원님들의 공감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같이 저 회사를 욕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돌이켜보니 좀 마음이 공허해서 글 써봤습니다. 한때는 열정으로 불타올라서 어떤 일이든 버티고 해낼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과 패기가 있었는데 저만 힘들면 몰라도 가족들이 같이 마음 아파하니까 저도 순식간에 무너지네요. 퇴사하자마자 부모님 뵙고 오손도손 식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 선택에 전혀 후회는 없네요 ^^

앞으로 뭐해 먹고 살지는 좀 더 고민해보려고요. 저는 뭐 이런 이유로 일을 그만뒀지만, 그렇기에 이 업계를 지키고 있는 선배님들이 그저 존경스럽습니다. 


오디오가이를 포함해서 인터넷에 이렇게 긴 글을 써보는 건 처음이네요

두서없이 쓴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운드 업계가 부디 정상화(?)되기를 바라고 회원님들도 번창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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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바빌론님의 댓글

제가 몇달동안 고민하면서 올리고 싶었던 뉘앙스의 글을 거의 똑같이 올려주셨네요. 저도 오디오가이에 많은 연차 되시는 선배 사운드 업계 분들께 궁금해 댓글 남깁니다. 글쓰신 분 재직하시던 곳이 어딘지도 알것 같은 느낌...

대체 2022년에도 이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사운드 업계에서는 당연하듯 자행되는 건지 궁금합니다. 주 52시간은 말할것도 없고 제가 수습사원 일할때는 무급으로 일했고 매일같이 철야에 집에가서 자려면 택시비때문에 오히려 적자인 상황이 파다했었습니다... 경력은 당연히 소득 증명이 안되니 공식적으로 증명도 안될뿐더러 DAW활용이나 믹싱 마스터싱 능력 가지고 같은 업계로 이직해도 경력 능력 연봉 다 후려치기 일쑤에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다' 는 말 수도 없이 들었던것 같습니다.

불행중 다행으로 저는 폭언 폭력으로 부터는 비교적 자유로웠지만 정말 군대 그 이상의 환경인 스튜디오에서 최저임금도 안되는 시급에 매일 철야하는 살인적인 업무강도를 버티며 일하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저도 최근에 그만두고 쉬고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말도 안되는 기업들은 결국 망할거라고 봐서 입니다. 크게 성장한, 그리고 성장할 기업들은 HR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전 제 후배들 만나면 하루빨리 다른곳으로 뜨는게 나을것이라 조언하는데 업계 선배님들 생각은 어떠신지들 궁금합니다.

Fermata님의 댓글의 댓글

댓글 감사드립니다.
시장은 결국 수요와 공급으로 단가가 결정 되는데 아무래도 사운드 스튜디오는 전 제작 과정 중 가장 마지막에 위치해있고(남은 예산으로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뜻이겠죠) 이 과정에서 어떻게든 일을 따내려고 치고박고 경쟁하다보니 이 사단이 났다 생각합니다.
보통은 이렇게 까지 상황이 뒤틀리는 걸 막기 위해 법이라는게 존재하는 건데... 업계에선 법을 무슨 학급 교칙 정도로만 생각하고 대충 넘겨버리니 제 살 깍아먹다가 직원들 살까지 뜯어먹기 시작한거죠.
이 곳의 관행이다, 여긴 특수한 직군이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라... 뭐 핑계도 많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법 지키면서 장사할 자신이 없으니 책임을 직원들한테 돌려버리는 거죠. 경영난에 머리 아픈건 이해하지만 냉정하게 사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무능한 리더가 맞습니다.
업계에 만연한 이런 구시대적인 마인드는 우리가 진짜 음악이나 미술을 하는 뭐 그런 순수 예술가라면 백번 천번 양보해서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해보겠다만은, 저희 디자이너 이기 전 기술직이고, 솔직히 까놓고 말하면 엄청 성공하더라도 막대한 부나 명예가 뒤따르는 직업은 아니잖아요.. 그래봤자 스태프죠. 대체 얼마나 고결한 직업이기에 청춘까지 내던지고 개인의 삶을 희생해서 일하는 것을 강요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여기 저기 악덕 스튜디오에서 법의 철퇴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조금씩 들려오면 그제서야 업계가 좀 정신차리고 클라이언트 들에게 뭘 요구하기 시작할까요? 하하... 하여간 다들 고생많으시고 님도 고생 많이 하셨네요 앞으로는 좋은 날만 오시길 바랍니다

휘리님의 댓글

요즘 영상이랑 광고쪽 일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쪽바닥 보면서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음향 10년차 어시가 받는 비용보다, 영상 2년차 어시가 받는 비용이 한 2배는 된다는것도 놀라웠고요.
그냥 예산을 분배하고 결정하는 사람들 인식에 '영상은 비싸다' 라는 인식이 있지만, 사운드는 크게 고려 대상이 아닌거 같아 보였습니다.
오히려 영상에서 만난 사람들중에 정말 많은 숫자가 음향 하시던분들이더군요....

자주 가는 영상 커뮤니티에서 음향/음악 커뮤니티에서 보던 매우 낱익은 닉네임들을 많이 봅니다. 세상이 변해가는거죠.
바닥에서 만난 아는 영상감독님은 몇년전에 녹음실 노예로 88만원 이하의 박봉 받으면서 1년을 버티시던 분이었는데,
지금은 억대 연봉 번다면서 탈출은 XX순이라는 막말도 서슴치 않고 하시더군요. 그 말에 동의하진 않지만요.

Fermata님의 댓글의 댓글

이쪽 일을 하기 전까지 동시녹음 팀에도 소속 되어있어봤고 촬영팀, 조명팀, 연출부까지 들어오는대로 서브일을 다 해봤는데 확실히 일은 고되지만 제가 녹음실에서 받던 페이의 기본 최소 2배씩은 챙겨갔습니다. 일만 꾸준히 잘들어오면 서브페이로도 달에 3배까지도 차이 나겠더라고요. 같은 영상 계열인데 왜 사운드 디자인만 처우가 이렇게 된 지 모르겠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방송국에서 저희 스튜디오로 보낸 단가 계약서(?) 같은 걸 보게 되었는데 단가가 진짜.. 처참하더라고요;; 아무리 사운드 작업이 다른 팀(컷편,DI등)보다 빨리 끝난다지만 헐값 수준의 단가는 빨리 개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Fermata님의 댓글의 댓글

아구 그건 몰랐네요 ㅎㅎ;; 별 내용은 없었고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길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Fermata님의 댓글의 댓글

아무래도 개당 단가가 좀 부족하다 보니 보통 한번에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습니다. 부업(?)의 개념으로만 하신다면 다른 일과 충분히 병행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디오강님의 댓글

그... 저는 올해로 경력 11년차가 되는 한 엔지니어 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정말 느끼는게 많네요..

저 역시 11년전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이 바닥에 들어왔는데 1년반전에 일을 시작하신, 어찌보면 10년 후배 Fermata 님도 10년전의 저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걸 보니 마음이 아픈 동시에 업계에 회의감이 들 정도입니다..

저는 첫 회사에서 Fermata님과 비슷한 업무 강도와 처우, 암울한 비전에도 불구하고 5년 정도 버티다 나왔습니다.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겠습니다만 마지막 5년차때(2016년) 제 마지막 월급이 세전 190이었으니 우리의 상실감과 박탈감, 직업에 대한 불만족은 얼추 비슷할 것 같습니다..

저는 Fermata님이 느끼시는 현재의 감정을 5년차가 되고나서야 터뜨리고 결국 이직을 감행했는데요. 물론 1,2,3,4년차때도 괴로움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과묵하고, 어리석게도 우직한 제 성격에.. 겉으로 표출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이직을 감행하고 나니, 내 가치가 그렇게 낮진 않았구나, 나를 알아봐주는 회사가 있구나, 세상은 넓구나, 더 좋은 회사도 있구나 등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실하고 우직하게 일하면 된다는 경직된 사고가 바뀌면서 두번, 세번의 이직도 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11년 경력중 첫회사 5년을 제외하고 나머지 6년동안 이직을 감행하며 4곳의 회사를 더 다녔습니다. 이직을 해서 잘 다니는 와중에도 좋은 조건의 회사의 공고가 나오면 또 지원하고 또 도전했습니다.

제가 저연차일때도, 그리고 현재에도 동료들 사이에서 자주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쪽에서 성공하려면 자기가 스튜디오를 직접 차려야 한다. 팀원으로 시작해서 관리자로 올라가더라도 이 업계는 고연봉으로 일하기 힘들다."

제 성격상 저는 사업을 하진 못하지만..  여러회사를 거친 끝에 현재는 나름 만족하며 적당한 연봉과 잘 훈련된 업무능력으로 그럭저럭 살고 있습니다.

저의 경험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Fermata 님을 응원하겠습니다. 제가 해드릴수 있는건 없어도 잘 나오셨다고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근로자로서의 권리와 처우가 무시되는 곳에서 묵묵히 굴복하는 것이 미덕인줄 알았던 저의 어린시절에 미안했던 적도 많았는데, Fermata님의 깨어있는 용기와 현명한 패기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여전히 악덕 사장들이 많은건 사실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곳 역시 많이 존재합니다. 꼭 좋은 엔지니어로 성장해 역량을 마음껏 펼치는 곳에 정착하시길 바랍니다.

0db님의 댓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한달에 백만원만 벌었어도 저는 다른직업 구할 생각 안했을거 같아요. 그만큼음악을 좋아하기 때문이죠.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많은 음악인중에는 백만원만 벌어보자 하시는분도 많을거에요. 저도 그랬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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